우리 집안의 유래  

화순의 하씨 유래

하씨(河氏)는 삼한시대부터 진주(晋州)의 토성(土姓)으로 고려시대에는 크게 번창했던 씨족이다.

하씨는 진주에서 오래 살았고 그곳에서 번창했기 때문에 본관을 진주(晋州) 또는 진양(晋陽)으로 쓰는 본이 하나이다.

그러나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派)와 하공진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로 크게 나뉘어 있고 두 파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기 다르게 계대하고 있다.

화순에 사는 하씨들은 진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 후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시조 진은 고려 정종 문종때(서기 1040년경) 사직(司直) 벼슬을 했다.

하씨는 9세(世) 집에 이르러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집은 서기 132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서해도 안염사 경주부윤 문하시랑 찬성사 등을 역임했고 진주부원군에 봉해 졌다.

후에 원정이란 시호를 받아 원정공(元正公)으로 불리고 있다.

집의 아들인 윤원도 진산부원군에 이르렀는데 윤원의 아들 삼형제 유종, 자종, 계종의 후손들이 우리나라 하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순의 하씨들은 자종의 5형제 아들중 네째 결로 이어졌고 결의 장남 금으로 계승되었다.

금이 조선 세종때 통정대부 공조 참의를 지냈기 때문에 후손들이 참의공파로 부르고 있다.

하씨가 화순에 처음 들어온 것은 참의공 금의 7형재중 네째 아들인 치였다. 지금 이서면 야사리에 살고 있는 하씨들이 치의 후손들이다.

치는 정읍에서 살면서 여산군수를 역임했는데 무슨 이유로 동복으로 이사오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1450년 대에 동복에 온 것만은 확실하다.

치로부터 → 자담 → 서정 → 한 → 언식 → 대표 → 윤구 까지 6대에 걸쳐 동복에 살다가 윤구가 이서면 야사로 이사했다. 윤구는 조선 광해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내다가 병자호란때는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 후손들이 지금 이서면 야사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남면 남계리에 살고 있는 하씨들은 참의공 금의 큰아들 대의 후손으로 정읍에서 살았는대 시조로부터 19세인 갑산이 임진왜란때 의병 300여명을 데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정하자 그 부인이 아들 기남을 데리고 친척을 따라 동복으로 이사했다.

그때가 1570년대로 하씨가 처음 화순에 온 뒤 120여년이 지난 뒤였다. 이 후손들은 동복에서 살다가 1950년 6.25 동란을 맞으면서 남면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서면 야사에 살고 있는 윤구의 후손은 약 15대를 사는 동안 1000여 세대로 불어났지만 현재 화순에는 100여호가 살고 있고 남면 남계리에 있는 갑산의 후손도 16대를 살면서 800여호로 불어 났지만 현재는 20여호가 살고 있다.

- 정재신 기자 -     



우리집안 간이 족보(晋陽 河氏)

호칭 이름 생년 配 본관 기일
24 春淸(춘청) 瑞君(서군) 영조정미 1727년 광산노씨 9월9일 서방면용봉리후艮좌
25 廷明(정명) 慕三(모삼) 정조갑진 1784년 장흥마씨 순조을유 1825년 서방면용봉리後艮좌
26 鎭文(진문) 海龍(해룡) 순조계해 1803년 영월엄씨 신미 1871년 3월 20일 서방면용봉后寅좌
27 聖源(성원) 永在(영재) 순조신사 1821년 남평문씨 경인 1890년 2월 6일 화순감곡리蓮峯艮좌
28-2子 浚(준) 相信(상신) 헌종병오 1846년 밀양박씨 갑인 1914년 12월 4일 만연산수문嶝丑좌
29-3子 學秀(학수) 仁明(인명)
聖律(성율)
고종을축   8월8일 화순읍공동묘지
29-3子-配   良林(양림) 광무4년 1월16일 전주이씨父국서 1994년 01월 02일 화순읍공동묘지